2023년 8월 15일,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12번째 장편 영화로, 오랜만에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을 영화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의 핵심적인 인물로써 원자폭탄의 개발에 많은 기여를 하였지만, 그 파괴력을 직접 목격한 뒤로는 반대했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많은 업적을 이루었고 그에 대한 평가도 극렬하게 갈리는 인물 오펜하이머, 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생애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 환경은 부유했으며, 교육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있던 부모님 아래 어릴 적부터 학문에 집중할 수 있었고, 우수한 성적 또한 거두면서 1922년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에 입학, 남들보다 1.5배 많은 학점을 따면서도 3년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을 하게 됩니다. 또한 언어 공부에도 열심이어서 고교 시절에는 그리스어를 습득해 플라톤의 저서를 원서로 읽었으며,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고 네덜란드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알려집니다.
대학원 시절
1924년 학부 과정을 마친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물리학과인 캐번디시 연구소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맥스웰, 톰슨, 러더퍼드, 보어, 채드윅, 왓슨, 크릭 등 실험물리학으로 쟁쟁한 과학자들이 즐비하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오펜하이머는 잘 적응하지 못하고 신경쇠약 및 우울증까지 걸렸습니다.
그러던 중 1926년 닐스 보어의 조언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을 떠나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로 옮기게 되고, 이곳은 당시 페르미,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등에 의해 이론적인 양자역학이 태동하던 곳으로 이론물리학이 메인이 되었던 이 곳에서 오펜하이머는 물 만난 고기처럼 공부하여 9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때 굉장히 거만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쳐, 강의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교수를 교단에서 끌어내리고 본인이 수업을 하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능력을 출중하나 사회적인 면은 좀 떨어지는 전형적인 괴짜 천재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학자로서 본격적인 행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의 교수직
대학원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Caltech)에서 잠시 연구원으로 있다가 UC버클리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그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UC버클리의 교수이자 연구자로서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등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었습니다.
1930년대 말에는 찬드라세카르 한계(전자 축퇴압으로 백색왜성이 스스로 중력붕괴를 하지 않는 최대질량)를 중성자별에 적용해, 동료 학자들과 함께 이론적으로 회전하지 않고 차가운 중성자별의 질량이 태양의 3배를 넘으면 중력붕괴를 일으켜 블랙홀이 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톨만-오펜하이머-볼코프 한계(Tolmann-Oppenheimer-Volfoff Limit, TOV limit)).
이 당시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공황 시절 유행하던 좌파사상에 경도되어 여러 좌파운동에 참여하고 스페인 내전의 공화국군에 대한 모금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런 모습은 추후에 그가 크게 곤욕을 치르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맨해튼 계획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2년 맨해튼 계획이 시작됩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과학자들은 우라늄을 이용한 폭탄의 실현 가능성을 탐색하고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시설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맨해튼 계획을 승인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지원하게 됩니다.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새로운 연구소를 만들며 이를 맡게 될 적임자를 찾던 중 오펜하이머를 후보에 올렸는데, 이때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제작에 필요한 지식은 누구보다 충분하였지만 노벨상 수상자까지 포함된 거대 연구진을 이끌기에는 경력이 부족하고 공산주의자라는 의심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인정받아 연구소에 채용되게 됩니다.
오펜하이머는 이후 훌륭하게 연구소를 이끌며 결국 원자폭탄 개발을 성공하였고, 이 원폭으로 일본제국을 항복시키며 제2차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핵공격을 받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는 이후에 핵무기 회의론자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 어록 中..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 더 강력한 살상력을 가진 수소폭탄 개발에 극렬히 반대하게 되는데, 미국의 후발주자로 따라오던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곧 수소폭탄 개발도 성공하자, 반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부터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1953년 12월 비밀정보접근 권한을 빼앗기고 공산주의자로 몰리며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말년의 오펜하이머
1957년 휴양지로 유명한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의 해안가에 2500평 정도 크기의 땅을 산 후 그곳에서 아내, 딸과 함께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실제 미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오펜하이머 비치’가 있습니다).
정치권력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물리학에 관한 논문 작성을 계속하였으며 유렵과 일본을 여행하며 그곳의 사람들과 과학사, 사회과학의 역할, 우주의 본질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후 1965년 후두암을 진단받고, 투병하다가 1967년 고등연구소가 위치한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향후 62세로 사망하게 됩니다.
68년만에 누명을 벗다
2022년 12월 15일, 구 소련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68년 만에 벗게 되었습니다. 미국 에너지부 장관의 서명을 통해, “오펜하이머의 보안 승인에 대해 1954년 원자력위원회의 결정은 위원회 자체 규정을 위반한 결함 프로세스”라며 오펜하이머 박사가 겪은 과정의 편견과 불공정에 대한 더 많은 증거가 밝혀졌고 그의 충성심와 애국심은 확인됐다”라고 밝혔습니다.
과거에 오펜하이머는 핵무기 사용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느끼지만 다시 돌아가도 맨해튼 계획을 진행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하였고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는 것은 종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진보적인 성향과 인도주의적 사상이 어우러져 스스로에게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좌절케 했지만, 이는 원폭 투하로 살상당한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연민을 갖는 것이었지 특정 사상을 지지하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영화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한 천재의 삶을 재조명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세상을 파괴시킬 수도 있는 냉철한 선택을 해야했던,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누명을 쓴 채 살다 간 한 남자의 역설과 생애를 보고 싶다면 지금 바로 영화관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요?